산, 바다, 안개: 헤어질 결심 리뷰 (스포일러)
짧은 식견으로 작성된 글입니다. 틀린 부분이 많을겁니다.
여러 의견 댓글로 남겨주시는것 환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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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질 결심을 보고, 여운이 깊게 남아 여러 해석과 리뷰, 인터뷰를 찾아보았다.
내공이 깊은 글들을 읽으며 세상엔 정말 교양이 깊은 사람들이 많구나 감탄하게되었다.
그런 분들에 비하면 글이 부끄럽지만, 나의 해석도 그런 누군가와 나누고싶어 적어본다.
[산]
0. 1부는 산에서 시작한다. 산에서 일어난 기도수의 살인을 배경으로 이야기는 전개된다. 배경은 바다가 생각나는 부산이다. 부산 (釜山)이라는 이름도 생각해보면 오묘하다. 박찬욱감독은 인터뷰에서 부산의 바다와 풍경을 좋아해 부산을 배경으로 한 영화를 꼭 찍고싶었다고 했다. 어찌 보면 부산이라는 장소는 산과 바다가 공존하며 경계를 이루는 셈이다.
1. 해준과 서래는 바다를 좋아한다. 을지로 4가 출신이지만 바다를 좋아하는 해(海)준, 해군을 나왔으며, 근무지를 부산으로 선택했다. 바다를 좋아한다며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바다를 좋아한다' 라고 말하는 서래에게 동질감을 느낀다.
2.1. 그러나 해준과 서래는 사실 산을 동경하는 인물들이다. 최연소 경감, 주말부부로 좋은 관계를 유지, 피의자에게도 친절을 베풀어야 하는 해준의 모습은 흔들림없이 높은 곳을 향해 서 있는 산과 같다. 극 중에서 해준은 항상 높은 곳(주택가의 지붕이든, 바위로 이루어진 산이든) 을 오르며 진실을 깨닫게 된다.
2.2. 우뚝 솟은 산은 남근의 형상으로 나타나는 '남성성'을 의미한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따르면, 모든 남성은 남근기를 거치며 거세의 위협을 느끼고(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이를 극복하며 완성된 초자아를 형성하게 된다고 했다.
2.3 여성에게도 이러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나타날 수 있는데, 여아의 경우 음경이 없다는 사실에 분노하게 되며, 이것이 곧 남근 선망(penis envy)으로 이어진다고 말했다(엘렉트라 콤플렉스-아버지를 원해 어머니를 경쟁상대로 여기게 됨. 할아버지의 산을 찾기 위해 어머니를 살해하고 한국으로 떠난 서래의 이야기는 엘렉트라 컴플렉스의 배경과 유사하다). 남아가 거세의 위협을 극복하며 초자아를 형성하는 것처럼, 여아 또한 이러한 남근 선망을 각자의 방식으로 극복하며 초자아를 형성하게 된다고 했다.
2.4 프로이트의 이론이 옳은지 그른지는 논외로 하고, 서래는 '산'으로 표현되는 남성성을 선망하도록 만들어진 인물이다. 할아버지가 물려주신 산을 찾아 한국에 왔다. 그러나 당연히 할아버지의 산을 차지할수 없는 것 처럼, 서래는 '산'을 가질 수 없는 운명이다. 기도수의 행적으로 미루어 짐작할 때, 서래는 그가 아끼는 산에 오를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을거란 생각이 든다. '남근을 박탈당한 여아'라는 프로이트의 이론처럼, 서래는 '산'을 박탈당했고, 선망한다.
2.5 이러한 남근선망의 해결 방법으로, 서래는 가지지 못한 남성성을 파괴하는 선택을 한다. 기도수가 과시하는 남성성인 비금봉 꼭대기에 직접 올라 그를 떨어트리는 것으로(완전범죄만을 목표로 했다기엔 매우 번거로운 살해 방법이다), 서래는 그녀에게 주어진 콤플렉스를 극복하게된다. 즉, 서래의 서사는 오이디푸스의 그것처럼 타인에게 파멸을 부른다. 그로써 서래는 가지지 못했던 '산'에 다가가게 된다.
3. 해준도 서래를 자신처럼 '산'에 인식하고 있다("서래씨는 자세가 꼿꼿해요"- 사실 이 부분 해준의 대사는 박찬욱 감독이 박해일 배우를 사적으로 만나고 받았던 인상이라고 한다. '헤어질 결심'이 박해일과 탕웨이를 먼저 캐스팅하고 만들어진 영화임을 생각해보자). 형사와 피의자로 만났지만 산보다 바다, 말씀보단 관찰을 선택하는 서래에게 동질감을 느끼고, 이러한 서래에게 자신도 모르게 마음을 빼앗긴다. 서래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형사로서, 가장 유력한 용의자인 서래를 체포해야 할 해준과, 그러한 해준을 무너뜨려야하는 운명의 서래, 이들의 만남은 둘 중 하나의 파멸로 이어질 것이므로 불안하다.
4. 이러한 해준의 고민은 연쇄살인범 홍산오(박정민 분)를 마주하면서 해결된다. 해준과 홍산오 모두 높은 곳을 오르면서도 사랑에 갈등하는 인물이다. 다만, 홍산오는 선택의 기로에서 스스로 추락을 선택한다. 사랑을 포기하는것과 사랑에 의해 붕괴하는것, 둘 사이에서 해준은 새로운 선택지가 있음을 깨닫게 된다.
5. 서래에 대한 집요한 관찰(형사-용의자 관계였다면 불가능했을) 끝에, 결국 그녀가 범인이었음을 알아낸 해준은 자부심있는 경찰로서의 자신을 스스로 붕괴시키는 선택을 한다. 그것은 원래 서래의 일이었으나, 서래를 지키기 위해 해준이 스스로 선택한 방법이었다. 해준은 서래에게 이 사실을 고백한다. 우리는 더 이상 이전과 같을 수 없노라고. 이 말을 들은 서래는 마음속으로 기뻐한다. 산을 무너뜨려야 하는 서래를 위해 직접 그것을 포기한, 해준의 말은 서래에게 그 누구도 말해주지 않은 사랑고백과도 같았다.
[바다]
6.1 2부에서 영화의 배경은 바다로 옮겨진다. 해준의 아내가 있는 이포의 상징은 '안개'. 해준의 아내인 정안(이정현 분)은 안개와 같은 인물이다. 모든 것이 초록과 파랑으로 명확하던 부산과 달리, 무채색 배경의 이포에서 해준은 방황한다.
(이 부분 '씨네21' 정서경 작가 인터뷰 참조)
6.2 '정안'을 반대로 하면 '안정'. "원전 완전 안전"이라는 대사와 함께 공무원이라는 직책을 가진 정안은 안정성과 원점 그 자체, 해준의 구심점 같은 역할이다. 그러나 해준의 직업은 안전을 위해 불안전의 영역에 존재하는 형사이다. "당신은 살인사건이 있어야 살잖아" 같은 대사에서 잘 나타난다. 서래西來는 서쪽에서 온, 불안전의 세계에 사는 사람이다(화물칸에 갇혔던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준 것 만으로 기도수와 결혼을 했고, 편집되었지만 "한국에서는 남편이 3일째 연락이 안되면 신고를 합니까?" 라는 대사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 해준은 안전의 영역인 정안과 함께하는 것 보다 불안전의 영역인 서래와 함께하며 편안함을 느낀다. 서래를 관찰하는것 만으로도 차에서 숙면을 취하고, "문득 다시 사는것 같았죠?" 같은 대사는 이러한 맥락이다. 안정된 영역인 이포에서, 해준은 갈피를 잡지 못한다.
7. 그러던 중 서래가 새로운 남편인 임호신(박용우 분)과 함께 이포로 도망쳐온다. 임호신은 남성성이 거세된 인물이다. 문제로부터 도망치고, 중심없이 주변에 휩쓸려 움직이는 그의 모습은 서래가 그와 결혼한 이유가 되었을지 모르지만(서래의 불행한 운명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실은 서래가 사랑하는 것이 '산' 이었음을 그녀에게 자각시켜주었다. 마침내 서래는 해준의 남성성과, 그녀가 사랑하는 해준의 모습을 되찾게 해주기로 결심한다. 서래는 이포에서 해준 앞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8. 해준은 이해하지 못한다. 스스로를 붕괴시켜가며 겨우 떠나보냈는데, 왜 다시 나타났는지, 왜 이포에 왔는지, 임호신은 왜 죽인건지 서래에게 묻는다. 1부에서 해준이 서래를 끊임없이 알고싶어 했다면, 2부에서 해준은 서래를 끊임없이 의심한다. 서래의 생각은 확고하다. 1부에서 해준이 서래를 위해 스스로를 붕괴시킨 것처럼, 서래도 스스로를 파괴해 해준을 지키고 싶었던 것. "당신의 사랑이 끝날 때, 나의 사랑이 시작됐죠." 해준이 사랑을 끝낸 방법으로, 서래도 사랑을 끝내려 한다. 그리고 서래의 사랑이 끝날 때, 다시 해준에게 새로이 시작될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랑은 절대 끝낼 수 없다.
"나는 해준씨의 미결 사건이 되고 싶어서 이포에 갔나봐요. 벽에 내 사진 붙여놓고, 잠도 못 자고, 오로지 내 생각만 해요."
9. 안개 너머의 대상이 초록인지, 파랑인지 구별하는것은 서래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것이 무엇인지만 확실하게 알았을 뿐, 그러나 아직 안개 너머를 보지 못한 해준은 그것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이러한 서래와 해준의 차이는 호미산에서 나타난다. 해준은 자신이 그녀를 의심하는 것 때문에 기도수에게 그랬던 것처럼 서래가 자신을 절벽에서 추락시키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서래의 입장에서 이미 무너지고 깨어진 해준에게 그럴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서래는 해준에게 핸드폰을 건네주며 '붕괴 이전으로 돌아가'라고 말한다.
10. 임호신에 의해 정안(안개)이 떠나게 되고(여기서 정안의 동료 이주임이 사실 남자였던 것도 안개같은 정안의 캐릭터가 드러나는 부분이다), 화창한 날씨의 이포에서 해준은 마침내 서래와 자신의 마음을 명확히 볼 수 있게 된다. 서래가 해준을 위해 자신을 파멸시킬 것임을. 해준의 곁에 머물고 싶지만 자신의 운명때문에 해준이 붕괴하는것을 원치 않았던 서래는 바다에 파묻히는 방식으로 영원히 해준의 곁에 남고자 했다. 서래를 잃고 싶지 않았던 해준은 뒤늦게 서래를 쫓지만, 자신의 앞에 있는것이 초록인지, 파랑인지(사실 한 가지 색이었을) 헷갈려 안개가 걷힐때까지 기다렸던 해준. 그의 앞에 있는건 모래로 쌓아올린 산을 집어삼킨 바다와 저물어가는 해였다.
11. 해준과 서래의 무덤(모래로 쌓아올린 산)의 투샷에서, 해준이 전혀 위화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도 결국 해준이 서래의 내면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서래를 알기위해 많은 시간동안 그녀를 관찰한 해준이지만, 오히려 그런 해준의 마음 깊숙한 곳을 꿰뚫어 본 것은 서래였다. 그녀가 원했던 것처럼, 서래는 해준에게 영원히 미결로 남았다. 박찬욱 감독의 인터뷰대로, 해준의 남은 인생은 서래를 찾으면서 혹은 그녀가 다시 나타나기를 기다리면서 보내지게 될 것이다.